과거의 여름과 함께 유령이 온다
“여름이었다.”는 문장이 가진 정서는 분명하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풋풋한 사랑이든 여름방학에 가족들과 보낸 기억이든 상관없다. 단지 뜨거운 계절에 생긴 일을 진심으로 소중히 하면 된다. 계절이 반복되어도 그때의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고, 아련한 감정은 자꾸만 커진다. 보통은 과거를 그리워하더라도 현재를 잘 살아간다. 하지만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거는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가? 과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재의 자리에 마치 유령처럼 침투한다.
<이방인과 보낸 여름>의 주인공 히데오는 유령에 홀린다. 이 영화에 나오는 유령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히데오의 이웃집에 사는 케이고, 하나는 돌아가신 부모다. 케이가 히데오를 찾아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를 유혹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그녀는 애증의 마음으로 접근한다. 반면 히데오의 부모가 히데오를 만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현장조사을 갔던 히데오가 기분 전환 삼에 고향 아사쿠사에 방문하고, 거기서 아빠를 만난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 고향을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간단히 발생하는 일이다.
이 만남으로 무언가를 얻는 쪽은 히데오다. 그는 상실된 고향을 일시적으로 회복한다. 아사쿠사 안의 공간은 아사쿠사 밖의 공간과 달리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다. 이런 친숙한 느낌이 발생하는 건 일차적으로는 과거의 외양을 한 집과 젊은 모습의 부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핵심은 여름이라는 계절에 있다. 이 영화는 여름을 묘사함으로써 공간에 사람 사는 냄새를 불어넣는다. 얇은 옷차림과 시원한 아이스크림, 돌아가는 선풍기와 매미가 우는 소리가 과거의 모습과 결합한다. 작중 배경이 여름임에도 계절감을 느끼기 어려운 아사쿠사 밖 히데오의 삶과 대비된다. 여름은 과거라는 환영과 함께 오직 아사쿠사에만 존재한다.
이 환영적인 공간에서 히데오는 과거에 했을 법한 역할을 다시 수행한다. 부모는 말을 따라 하며 장난치거나, 흘린 땀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부모의 손길에 몸을 맡기기고 한다. 그는 자기보다 젊은 모습을 한 존재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보살핌 받는다. 히데오는 자신의 부모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즐긴다. 그가 썼던 시나리오 속 대사처럼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과거니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유령들에게서 돌아온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갑작스레 돌아올 동기는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유령들은 그들이 원해서 왔다기보다는,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를 그리워한 남성에 의해 소환된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과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히데오와 부모가 같이 나오는 회상 장면이 없다. 플래시백으로 과거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아가 그것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이 영화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어떠한 과거를 겪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유령은 과거에 살았던 부모의 외양만 비슷한 다른 존재는 아닐까? 혹은 이 모든 게 현재에 불만족하는 히데오의 망상은 아닐까? 영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상 그의 부모는 실재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를 보지 않았어도 과거는 특정한 방식으로 미화되고, 우리는 불확신한 것들을 확신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력함을 보여주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반복해서 부모 모습을 한 유령을 만날 때마다 히데오는 늙는다. 젊음과 건강을 바치면서 그는 과거의 모습을 한 환영 같은 존재들과 만났다. 그의 안색을 보고 걱정하는 이들은 아사쿠사 바깥의, 현재적인 존재들이다. 과거의 집에서 벗어나야만 그는 현재를 살 수 있다. 히데오는 과거가 지나갔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후반부에 히데오는 그를 구출한 동료에게서 “잊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에 상응하듯 그는 철거 예정인, 환영이 아닌 실제의 고향집에 가서 간이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이어지는 나레이션은 꺼림칙하다. 부모의 목소리로 들러오는 “또 오는 거야/기다릴 테니까”라는 말은 유령이 보내는 단순한 작별 인사일까, 아니면 다시 과거에 사로잡힐 그의 미래를 예언한 것일까?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여름의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필자소개
임지훈 (Image-forum Germany)
서문에 쓰기는 좀 그렇지만 쓰고 싶은 말들
산마님에게서 같이 전시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전시할 자격이 있나?”였다. 누가 자격을 부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는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안 갔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나 혹은 타인에 의해 부여된 위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산마님은 같이 전시하는 다른 분들도 전시 경험이 없는 신진 예술가라고 하셨고, 나는 망설이다가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전시 주제인 ‘여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여름은 뭐든 간에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계절이다. 폭염이나 폭우 같은 이상기후부터 여름이 불러일으키는 짜증이나 분노 같은 감정까지. 평상시에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에는 이런 것들이 한층 강렬해진다. 이런 여름을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피할 수 없다. 나는 현재의 여름을 잘 살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의 여름을 생각했다. 과거와 미래의 여름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현재와 관련돼 있다. 분명한 위기가 찾아왔는데 어찌할 수 없다 보니 아예 망해버린 미래를 생각하거나, 현재를 잠시 잊게 하는 과거의 환영에 빠지는 거 아닐까?
과거의 여름은 미화된다. 그것이 실제로 그렇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실제로 좋은 여름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하나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주로 ‘청춘’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코드화된 여름이 있다고 느꼈다. 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몇몇 영화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소마이 신지 영화 속 여름과 환영에 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지 않다고 생각해서 쓰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에 대해서 쓸까 고민했다. 그 영화에 한껏 미화된 과거에 대한 장면(신형만이 자신의 아빠와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여름은 아니라서 눈을 돌렸다.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이방인과 보낸 여름>이다. 이 영화에는 과거의 모습을 한 부모의 유령이 나와 주인공을 홀리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는 유령이 주인공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유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가 너무 괴로운 것이라 미화된 과거로부터 살고 싶은 의지를 끌어와야 하는 인물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했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기 쉽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래의 여름은 불안하다.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아마 예전과 현재의 여름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현재도 폭염과 폭우 등이 일어나는데,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이런 불안을 담아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을 상상해서 서평으로 쓰려고 했다. 당시 구상했던 건 모두가 어떻게 잘 죽을까에 대한 얘기였다. 뭔가를 해결해 보자고 내놓는 대안들이 다 불만족스러웠고, 이럴 거면 차라리 덜 고통스럽게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글은 쓰지 못했다. 어떻게 죽는 게 좋을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안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닌데, 현재를 잘 살고 싶다는 내 마음이 분명해졌다.
이 전시 제목인 <구멍으로 여름 보기>는 내가 냈던 아이디어다. 전시 준비 전에 본 차이밍량의 <구멍>에서 따왔다. 이 영화는 가까운 미래에 전염병이 퍼져서 모두가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고 명시하진 않지만, 밤낮으로 계속 내리는 비를 보다 보면 왠지 여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장마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개인이 어떻게 막을 수 없는 여름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많은 물방울이 중력의 작용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 중력을 거스르고 구멍으로 누군가를 끌어올리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장면으로부터 이 전시를 꾸릴 힘을 얻었다. 위기가 찾아왔어도 무언가를 해야 했고, 내가 한 그 무엇 중 하나가 이 전시다. 동료들의 작품에서 이런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내가 동료의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말하기는 좀 그래서 말을 줄이지만, 이 작품들을 본 사람들이 여름을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임지훈 (Image-forum Germany)
<구멍으로 여름 보기>
구멍 안과 밖은 다른 상태에 있다. 구멍의 밖은 의도적으로 가리지 않는다면 늘 보이는 반면 구멍의 안은 그렇지 않다. 깊이가 얇다면 구멍의 안도 마찬가지겠지만, 구멍의 깊이가 깊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눈을 대고 보지 않는다면 안을 볼 수 없고.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눈을 대지 않으면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구멍은 언제 누가 보느냐에 따라 구멍의 안은 달라질 가능성을 가진다. 이 전시는 이 생각에서 시작됐다. 네 명의 신인 작가가 자기만의 구멍으로 여름을 보았고,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여름에서 벗어나 각자가 본 것을 그려낸다.
산마는 화명의 여름을 다룬다. 이 작업은 베드타운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화명 역명판의 이미지를 변형하여 (잠을 자기 위해 돌아와야 하지만) 떠나는 곳으로서의 화명과 이런 흐름을 만든 자본에 대해서 다룬다. 그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보는 자본의 시각에서 벗어나 낯설게 보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하여 베드타운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화명의 모습을 포착한 뒤 인공적으로 색을 조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여름 내가 난다. 이러한 여름 내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여름의 화명은 그곳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생명력을 펼치는 무대가 된다.
김태우는 여름을 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바다를 불러온다. 그런데 어딘가 현실과 다른 느낌이다. 그가 본 바다는 휴양지보다는 불안이 깃든 장소이다. 이 작품은 두 겹의 레이어가 있다. 안쪽 레이어는 뜨거운 태양, 바깥쪽 레이어는 바다를 형상화한 것이다. 아름다운 바다의 형상 위에 이질적인 이미지가 놓인다. 파도에 실려 온 듯한 이미지들에서 그의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햇빛에 과하고 노출되어 발생하는 질병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태양과 바다의 형상과 대비된다. <여덟 번째 거울 속의 여름>이라는 제목은 다른 여름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거센 자외선에 의해 각종 질병을 얻는 여름 또한 도래할 미래 중 하나다.
임지훈이 관심을 가진 것은 현재의 여름이 아닌 지나간 여름이다. 지나간 것은 미화되곤 한다. 그중 하나가 여름이다.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이방인과 보낸 여름>(1988)은 보편적이고 나아가 신파적으로 미화된 여름의 풍경을 그려낸다. 부모님과 보내는 어린 시절의 여름날이 중년의 남성에게 돌아온다. 영화 속 인물과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현재의 여름이 아니라 과거의 여름에 매혹되는 조건을 밝히고자 한다. 또 다른 글에서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써냈다. 전시와 여름에 대한 불안과 그럼에도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손희승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꺼낸다. 비가 쏟아지던 여름날, 집의 배관에서 물이 새서 아파트 비공용부를 적신다. 작가는 많은 분진이 떨어지는 공사 과정을 겪으며 답답하고 늘어지는 기운을 느낀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식물이었다. 누수와 분진에도 불구하고 식물은 꿋꿋이 생명을 유지한다. 식물은 작가 본인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삶을 살아갈 힘을 상징한다. <유수(流水)>로 이때의 경험을 재현한다. 이 작품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는데, 세 번째 파트에는 실제 식물이 있다. 전시기간동안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으며 계속해서 자랄 예정이다. 흘러가는 시간 동안 성장하는 식물에서 소진되지 않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작품에서 공통점을 뽑아내고자 했지만,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지금, 이 시점에 그 질문을 다시 한다면 ‘생명력’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여름은 불안하다. 폭염과 폭우 등의 이상기후가 지금 우리의 삶과 밀접해 있다. 그럼에도 생명력을 자꾸 얘기하게 되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여름이 펼쳐질까? 분명 낙관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름을 잘 견디고 다음 계절로 나아갈 것이다.
필자소개
임지훈 (Image-forum Germany)
신경정 개인전 《soft dash》
설명되지 않은 기억이 신경정의 화면을 가득 메운다. 신경정은 믿을 수 없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시각적 형상으로 되감는다. 스쳐간 기억이자,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이 기억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에 스스로 형체를 갖고 증식해가는 과정을 이미지로 남긴다. 작가는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한다. 그들은 뒤틀리고 억눌린 덩어리이며, 고통과 애착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맺힌다. 때로는 귀엽고 부드러운 형상을 가장하지만, 그 안에는 찢긴 감정과 파열된 시간의 잔해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다. 이처럼 분리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은 작가의 내면 어딘가에 머물며,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자리를 점유한다.
신경정은 사라지지 않은 트라우마의 장면을 억지로 지나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리를 고정한 채 스스로를 조율하듯 훈련하며, 그 시간 안에 머문다. 그것은 망각을 유예하는 행위이자, 다음 장면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기다리는 고통의 시간이다. 마치 만화의 엔딩이 영영 멈춰 있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혹은 그 다음 컷이 끝내 도착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정지된 시선처럼. 작가는 고통이나 해석을 부여하기보다, 그것이 그저 아무 일도 아닌 듯 흘러가길, 그러나 끝내 떠나지 않길 바란다. 《soft dash》는 멈출 수 없는 질주 속에서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틈입해 유동하는 하나의 불완전한 세계를 구성해가는 과정을 만들어낸다. 서로 어긋났던 기억 의 단면들과 조각난 믿음들은, 겹치고 뒤엉키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실의 세계를 침식 해간다.
《soft dash》는 불완전한 세계를 빠르게 파고들며, 멈출 수 없는 달리기를 담고 있다. 이 움직임은 빠르되 부드럽고, 집요하되 불안정하다. 부딪히고, 스치고, 때로는 붙잡고자 손을 내밀지만, 그 손끝에는 언제나 흩어지고자 하는 본능이 배어 있다. 작가의 행동은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그 모순이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채 서로 얽히고, 그 얽힘은 틈을 남긴다. 신경정은 이 틈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리된 자리들을 다시 잇고 봉합하려는, 실패를 전제로 한 반복의 몸짓을 택한다. 이번 신경정 개인전 《soft dash》는 스스로 닿지 않은 기억과 몸짓들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이어지려는 시간을 감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이어지려는 움직임 속에서, 작가는 어느 날 길 위에서 우연히 작은 까마귀 사체와 마주친다. 〈3주 된 까마귀 유조〉는 깃털이 벗겨지고 부패해가는 몸, 그럼에도 목을 치켜세우고 어깨뼈가 드러난 채 남아 있다. 눈과 살이 아직 뼈에 붙어 있는 이 유조는, 신경정에게 생존과 파열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다가온다. 〈출혈성 탈출〉에서는 날개 달린 여성과 길게 뻗은 팔 다리를 지닌 새가 등장한다. 이 존재는 꼿꼿한 인간의 다리와 여러 개의 동물 사지가 겹쳐지며, 동일한 방향을 향하지만 끝내 일치하지 않는 이중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새의 핏물이 마르지 않은 그 순간, 그것이 울부짖음인지 살고 싶다는 의지인지 모를 울음의 상태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또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무언가는 언젠가 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울 수 있는 근육을 만들어가는 과정, 진심이면 된다는 믿음. 그것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상태를 긍정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1층에 놓인 대형 회화 〈비늘과 흉곽〉에는 드러난 뼈와 베어진 단면을 가진 참치의 덩어리가 화면 위를 부유하듯 출몰한다. 그 형상은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어디론가 향하는 듯한 긴장 감을 품고 있다. 날렵하고 위협적인 꼬리를 펼친 참치는 누군가를 위협하는 듯 다가오지만, 이를 응시하는 인물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다. 〈비늘과 흉곽〉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일곱 점의 드로잉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 드로잉 속 존재들은 실재하는 감각의 일부로 작가의 내면에서 살아난다. 신경정은 기억을 재현하기보다는, 사소한 장면이나 꿈, 무의식적인 전환을 통해 그 시공간으로 회귀하는 감각을 따른다.
복도를 지나 보이는 첫 번째 방에는 한 여성이 덩그러니 앉아있다. 불안한 속도에서 물러난 그 몸은,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인 듯 느슨해져 있다.〈한이불〉은 불안정하지만 모아지는 에너지, 분열된 조각들이 잠시 하나로 포개어지려는 시도이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는 빛마저 응축되어 여성을 비춰준다. 무채색의 여성은 명확하지 않은 시선을 지닌 채, 〈그날 참외를 먹었어〉에서 입을 통해 쏟아내던 감각을 다시 물고리가 받아먹는다. 떨어지는 오물과 울부짖는 형상은 이전보다 더 응집된 환각을 불러온다.〈Errand〉에서는 바람과 함께 점차 변형되는 신체들이 서로 융합된다. 이질적인 감각들은 머뭇거리며 충돌하고, 그 충돌은 잠시 멈춰 쉼의 상태에 이른다.
약 3미터 길이의 작품 〈Tunatic〉은 바닥에 놓여 있다. 거대한 참치가 앞서고, 그 뒤를 토끼가 따른다. 참치는 새의 발을 가지고 있다. 유연한 몸체는 곧 발톱을 지니게 되고, 이 발톱들 은 융합되어 괴이하지만 디딜 수 있는 발이 된다. 그 옆에서는 토끼가 아래에서부터 달려온 다. 토끼는 긴 귀를 세우고, 긴장된 초식동물 특유의 감각을 유지한 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존재들은 낮고 길게 전시장 바닥을 따라 움직이며, 그 바닥은 마치 하나의 통로처럼 어딘가를 통과해간다. 신경정은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끝맺음이 아닌, ‘다음 시간’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그려낸다.
마지막 방에는, 뚫린 창 앞에 대형 회화 〈soft dash〉가 설치되어 있다. 그 안에는 창문 밖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여성, 개, 여우, 토끼 등 이질적이고 분열된 존재들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겹쳐지며 달린다. 무엇이 누구를 이끄는지, 누가 주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서로를 따르면서도 엇갈리고, 추월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겹친다. 이 작업에서 ‘달리기’는 목적지를 향 한 이동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상태 자체에 있다. 그것은 진화라기보다는 일시적인 공명이며, 하강도 상승도 아닌 초월에 가까운 순간들이다.
《soft dash》는 신경정의 첫 개인전이다. ‘전시’라는 공개된 형식으로 끌어내는 이 과정은, 작가에게 또 다른 형식적 고민을 안겨주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왜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지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의 묘사라기보다는, 틀어진 감각 그 자체에 대한 정직한 순정에 가깝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파편들을 오픈스페이스 배 공간 곳곳에 배치하며, 각자 다른 해석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전시는 아직 다 닿지 않은 것들, 아직 연결되지 못한 기억과 몸짓들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채 달리는 중이다. 이 변화와 전시로써 놓여짐, 그리고 전시에서 마주한 새로운 만남들이 앞으로의 움직임에 힘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유경혜 (오픈스페이스 배 큐레이터)
* 신경정 개인전 《soft dash》
5월 24일(토) ~ 6월 15일(일)
@오픈스페이스 배 Instagram
동광동5가 44-34
<한애 임시고별전 BYE BYE FOR A MINUTE> 작가의 말
2022. 12. 15 - 12. 30
이 전시에 대해 간단한 작가노트를 써달라는 공간 운영자님의 말에 흔쾌히 수락했지만 막상 쓰려하니 막막함이 밀려오네요. 그저 가볍게 어린 작가로서 느끼는 소회의 말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시고별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저는 스스로 작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나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작가님 이라는 호칭을 듣고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면서도 말이죠. 그 이유는 아마도 저에게 작가란 완성형의 무언가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를 굳건히 확립하고 그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인간이 제가 생각하는 작가였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모두가 그 과정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예술도 삶보다 선행될 수 없고 저는 그 과정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이번 전시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신 것 같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대부분 소품위주의 페인팅 작업입니다. 전시공간에 맞게 선별하였고 제 작업들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작업과 다음작업 사이의 맥락이 이어지는 작업들도 있으니 유심히 봐주신다면 그만의 의미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제 작업을 보시고는 ‘일러스트 같다’ 라는 말씀을 많이들 해주십니다. 저는 그저 웃으면서 ‘그런가요?’라고 대꾸하며 지나가곤 하지만 사실 지당한 직관의 말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제 작업은 엄연히 회화의 영역에 있긴하지만 동시에 제가 쓰는 짧은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출발한 그림이기도 하니까요. 또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 와 같은 같은 다른 창작물에서 인물들을 많이 차용해옵니다. 작품제목에서 어떤 영화에서 끌어온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죠. 그래서일까요? 작업이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제목을 쓰는 일이 저에게 또하나의 큰 재미입니다. 그러니 제 그림들을 보실때에는 작품명도 함께 살펴보시는 것도 하나의 관람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시고별전이라는 전시명에 맞추어 한 벽면에는 포스트잇으로 된 작업도 함께했습니다. 사실 이 포스트잇들은 사적인 습관일 뿐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들과 내부에 떠도는 말들을 써 방안에 가득 붙여놓는 습관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말들이 엄연히 내 몸 외부에 존재해서 마음대로 저에게 영향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이 전시를 함께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임시고별전의 의미가 단순히 잠깐 외부활동을 중단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현실적인 행태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학과를 졸업한 저의 동기들중 작업을 이어나가는 사람은 한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런 와중에 작가로 살아남고자 하고 미술계를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저의 사적인 단상들은 단순히 개인의 말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개를 들어 제방의 포스트잇에 휘갈겨놓은 말들을 보았습니다. 이 바깥과 안쪽의 말들이 이 전시의 테마와와 완벽히 들어맞는다 느꼈고 함께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선망하는 스웨덴의 작가 마마 엔더슨이나 영국의 피터 도이그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세계에 빨려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들이 가진 특유의 정조에 매료되었던 기억들은 제 소중한 자산이 되겠지요. 제 작업들도 그들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의 그림을 보며 느꼈던 기분들을 훗날 누군가 제 그림을 보며 느낀다면 그건 저에게 더할 나위없는 보람일 것입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이름들이지만 못들어보셨다면 한번쯤 찾아보시길 감히 권해봅니다. 제가 미술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작가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한 첫사랑같은 작가들이니까요. 12월, 추운날씨에도 전시장을 찾아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2022년 12월 23일
작가 한애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사람 발길이 끊긴 남해 빈집에는 여전히 누군가 살고 있다. 벽을 뚫고 자라는 고사리, 마당을 무성하게 채운 풀, 버려진 감나무나 유자나무 등이다. 그렇다면, 빈집을 가득 메운 생명들은 누구의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 이 빈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골 마을 빈집에서 공존을 상상하다’, 2025.1.15. 경남도민일보)
전시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는 부동산 시장에서 거래가치를 상실한 빈집에 주목하고, 빈집을 둘러싼 커머닝의 가능성을 살핀다. 주인없는 유자나무, 유자훔치기, 빈집의 새로운 주인찾기, 진(zine)만들기 등을 통해 이들은 우리가 생동하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와 빈집의 위치를 재감각하도록 돕는다. 그 결과 자연과 인공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비인간존재들이 가시화되며, 인간과 자연은 이미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음을 발견한다.
1부에서는 202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주인없는 유자나무>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한다. 프로젝트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빈집에 방치된 유자나무에 열린 유자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여기서 집과 나무는 전통적인 시장원리에 의해 주인에게 귀속된 사유재산이다. ‘빈집’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느끼고, 해결해야할 사회적 문제로 빈집을 인식한다. 남해의 유자나무는 시장경쟁력을 잃고 ‘대학나무’라는 명성은 과거에 머물러있다. 이들은 유자의 주인을 찾는 과정에서 ‘빈집’이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를 걷어내고, 시장 바깥에서 새로운 가치 발견하기를 시도한다.
<유자 훔치기>는 앞선 <주인없는 유자나무>에서 감행하지 못한 유자 서리를 제안한다. 전시가 진행되는 2월은 기온이 오르고 땅이 녹으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농부들은 새로운 한 해 농사를 준비하며, 밭 전체를 깊이 뒤집는다. 이 때까지 밭에 남아있는 것들은 인간이 아닌 땅으로 귀속된다. 11월 유자가 노랗게 익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존재감을 뽐냈다면, 2월 유자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땅으로 귀속될 준비를 한다. 이 시점의 유자와 빈집은 결국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태도를 공유한다. <유자 훔치기>는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유자의 위치성에 주목하며, 순리에 따르는 대자연의 법칙, 시장 가치의 생성과 소멸 사이의 기묘한 순간을 포착한다.
2부에서는 빈집을 둘러싼 기묘한 공존 상태를 진(zine)이라는 독립출판물의 형태로 확장한다. 진(zine)이란 잡지를 뜻하는 매거진(magazine)에서 ‘maga’를 뺀, 내용과 형식이 극도로 자유로운 출판물 형태의 창작물이다. 2024년 12월 16-17일 1박 2일동안 열린 진캠프의 참가자들은 남해군 남면 무지개마을의 빈집에 방문해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 나타나 빈집을 테라포밍하는 비인간존재들에 대해 탐구했다. 전시에서는 진캠프에서 만들어진 9개의 진(zine)을 소개하고, 관람객 누구나 자기만의 진(zine)을 만들기를 제안한다.
*전시 제목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는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노래 ‘평범한 사람’의 가장 마지막 가사를 그대로 차용했다.
카카카친구들
@cacacafriends
**위 글은 전시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의 서문입니다
어젯밤 거나한 술자리의 안주 냄새와 파운데이션과 비비의 어설픈 모방, 블랙 미러의 굉음, 손잡이의 모호한 점유. 편리함을 담보로 설계된 도시의 출근길 위에서 Q는 걸음을 재촉한다. 매번 스스로 배팅하는 시간 도박에서 10분 일찍 일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한다. "작가들에게 왜 우리가 작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직장인이 퇴근하고 쉴 때 작가들은 똑같이 일하고 작업을 하기 때문이에요." 계속 따라다니는 이 유령은 언제 떨쳐 낼 수 있을까. 천국의 계단 덕분에 너무 커져 버린 바지를 치켜올리며 종종걸음으로 무사히 세이프. 책상 위에 일곱 시와 네 시 방향으로 팔꿈치를 올려놓는다. 어제의 약속이었던 서류 앞에, 빨려 들어갈 듯한 목과 어깨를 제물로 바친다.
그가 잊고 살아가는 몸의 감각들이 있다. 매월 초면 밀려오는 카드 값 앞에서 이번 달은 또 어떻게 넘기나 싶은 식은땀과 주변의 소음과 같은 인간관계로 수축된 그의 몸짓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얼굴에 굵은 선을 그으며 웃는다. 나 역시 예측 가능한 기계 장치가 되어 버린 걸까. 남들과 비슷한 네모난 경기장에서 그의 스포츠는 한계를 넘어서는 뜨거움이 아닌 실리를 위한 움직임으로 귀결된다. Q는 생각했다. 굽어진 등, 적당한 각도의 무릎, 푹신하고 부드러운 마찰에만 익숙한 발바닥. 때때로 중력을 감각하는 허리까지. 잃어버린 근육의 기억들. 문득 그는 다리를 매만지며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지 궁금한 듯 눌러본다. Q는 떠올렸다. 이득 될 게 없을 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짙고 눈부시게 솟아오를 때’가 지금이라고.
정혜정은 이번 전시 《JUMP AND JUMP》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원초적 움직임을 재발견하고 계승하는 과정을 이미지화한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몸의 감각을 깨우는 점프(Jump)를 통해 일상의 관성을 넘어서는 생존 전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수치화되고 고정된 몸을 벗어나 늘 변화하고 확장될 수 있는 가변적 존재로 스스로를 다루는 그의 작업은 만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僕のヒーローアカデミア)>에 영향을 받아 객체화되고 퇴화된 몸을 다시 활성화한다. 만화라는 원천이 가진 정지된 움직임의 표현 방식을 선택했지만, 역설적으로 순간의 강도와 속도를 강조하며 필사적인 움직임의 포착함과 동시에 주체적 경험의 영역으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성장만화는 다 큰 어른이 봐야 감동이 있다. 아마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연속이 곧 생존방식이었던 Q에게 미도리야*의 뜀박질은 지금까지 미뤄온 진실된 나에게로의 움직임이기 때문일 것이다. 퇴근길에 발뒤꿈치가 유난히 간질거린다. 자세히 보니 살짝 공중에 들려있는 듯하다. 오늘따라 Q는 조금 다른 걸음으로 걷는다.
김도플 Doppel Kim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僕のヒーローアカデミア)의 주인공
참고자료_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_시즌1_4화_00:09:20 - 00:09:32
*위 글은 스페이스 위버멘쉬의 4th STARTER PACK PROJECT, 정혜정 개인전 ≪ JUMP AND JUMP ≫ 서문입니다
- 2025. 3. 29.(Sat.) - 2025. 4. 12.(Sat.)
- 부산광역시 사하구 윤공단로 75번길 19
- 11a.m. - 7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