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류의 삶
시인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롭다.
모든 문장이 동사로 끝나는 시를 쓰라는 청탁을 받은 날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은 원고를 넘기기로 한 날이다.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 동사(凍死)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시인은 중얼거렸다.
문제는 지난 일주일 사이에 최고 기온이 20℃를 기록할 정도로 날이 풀렸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자니,
시인은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고통이다.
급기야 시인은 동사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동사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날밤을 새우며 노트북 앞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고,
오후 10시 즈음에 잠자리에 들어,
저속노화를 위한 실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야간노동은 1급 발암물질이라던데,
문자 그대로 시가 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혹자는 문학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아마 생전에 많은 선인세를 받았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까지 동사가 떠오르지 않자,
시인은 동사가 존재하지 않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상상한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동사를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시인은 굳은 다짐을 한다.
이제부터는 ‘천재 시인이 재능을 숨기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천재 시인이 재능을 숨김’이라고 말할 것이며,
무언가에 대해 감탄할 일이 생겼을 때에는,
쓸 데 없는 동사를 길게 늘어놓지 않고,
‘지존’이라는 단어 하나로 종결할 것이다.
동사가 없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은 생을 갉아 먹는 시에 굴복하는 대신,
시에 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왜 저항하느냐고?
그것이 시인이니까.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아래와 같은 시를 쓴다.
동사입니다.
형용사가 자살했습니다.
끊임없는 투고.......
형용사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문예지......
문예창작학과.......
문단 권력......
책임을 묻겠습니다.
필자 소개
Sir Jakja Misang
시 제목은 ‘이류의 삶’인데,
정작 시인은 ‘사류의 삶’ 정도 살고 있다.
기사 작위는 스스로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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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산마
얼굴과 얼굴
대구에 가본 적 있니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
뭐에 홀린 듯 기차를 거꾸로 탔던 어느 날에는
동대구역에 발을 디디며 새 차표를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구에 가본 적 있는 사람일까 없는 사람일까
이번 여행은
선명하게 대답하기 위한 것
대구의 지하철 손잡이는
길이가 제각각
그 아래로 아이와 어른의 얼굴들이
손을 뻗는다
나의 첫 평양냉면은 대구에서 시도해 보기
대구의 부산안면옥은 나처럼 부산에서 왔다는데
테이블마다 얼굴이 두 개 혹은 서너 개
동그란 그릇과 시선을 맞대다가 얼굴을 들어보니
앞자리에 모르는 얼굴
이제 내 테이블에도 얼굴이 두 개
너무 많은 얼굴이
내 얼굴을 가로질렀다고 느껴질 때쯤
서둘러 여행을 끝내기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에게
사진 한 컷 부탁하기
아침부터 강풍이 불었다던 부산에는
아직도 바람이 휘몰아치고
가로등이 고장 난 오르막길을 견뎌야
고개를 내미는 집
어둠의 몸집이 커지는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아도
얼굴 한 점 없다
깜깜한 사위에 작고 붉은 불빛
동네를 지키는 오래된 자판기
자판기 커피와 자판기 우유를 잘 섞으면
완벽한 액체가 탄생하는데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쥐고서
옆에 얼굴 하나 더 있었으면 생각하는
-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옛집 뒷방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은
열심히 실패한
늙은 벽지와 괴팍한 창틀을 가진
5평 방에 55인치 TV를 욱여넣는
로라반정 1알과 라제팜정 반 알을 먹는
약을 먹지 않기 위해 약을 먹는
원룸에서 벗어나 원룸으로 돌아온
필사적으로 평온을 찾아 헤매는
나를 새로 살 수는 없어서 침구를 새로 사는
부지런히 게으른
대출받지 않는
침대 뒤 창을 열고 영원한 잠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견디는
0이 된
산책을 모으는
모은 산책이 단잠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포효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낯선 나를 모른 척하는
문을 닫는
“수진은 아파트 공용 스피커의 전선을 끊어버린 적이 있다. 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서 저지른 일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을 쓰는
방 안에 있는 집에 사는
나를 기다리는
필자소개
김지은
‘좋은 시는 단어를 사랑하는 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초등학교를 돌며 쓴 일기
오늘은 시를 썼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하나 더 쓸 일도 있었다. 기분 좋은 일들이 있었다. 오늘 한 일 중에는 출근도 있었다. 얼음을 왕창 넣은 커피를 사는 일도 있었으며, 왕창에서 지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떨어져 있을지를 잠시 떠올리는 일이 있기도 했다. 벌컥 마시는 일도 물론 있었다. 어느 사람이 하는 말들을 듣는 일 다음에는 어느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정도 규칙을 지키는 일이 있다가, 지키는 일에 규칙의 배제를 밑장처럼 슬쩍 깔아놓는 어느 아무개처럼. 한편 오전 중에 생각을 좀 해 보라는 말을 하는 일이 생각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을 듣기 전의 오늘 중에 있었다. 무언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린다는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공영주차장, 푸른 표지판. 어제보다 조금 더 점에 가까워지는 주차선. 아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인 차량들. 그 중에 어느 하나가 어떤 하나의 차량이군, 납득하는 일이 있었고 사람이 아닌 것의 뒷모습에서 얼굴을 찾는 일도 있었다. 사람의 그런 경향성에 대해 말해 준 그 사람 얼굴은 모른다는 일이 약간 웃긴 것 같다고 말할 법 한 사람 얼굴이 떠오르고 조금 뒤면 시가지 내부의 도로들을 주행하는 차들이 생각보 다 빠르다는 생각과 마주칠 것이었다. 합금과 타이어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과 내가 조금 더 알지 못하는 이름들이 한 날 한 시에, 너무 빠르게 다가오고 온몸이 굳 어버리는 일도 있을 수 있었다. 완전히 굳어버리고 그렇게 깊이 빠져 버리면 뜨지 못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든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낫을 들고 기역을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잊은 것을 또 잊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했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앞선 친구의 등으로 옮겨 타는 약간의 빛무리를 보았을 때를 떠올리다가 어느 길에서 맡았던 것 같은 어느 냄새를 떠올리다가 말똥의 형태를 떠올리다가 말도 말똥도 보이지 않는 흰 자갈길을 떠올리고 역 마차와 도로의 변화와 공영 주차장을 떠올리자. 무언가 너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한 일이 다 이런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기분은 시험하는 일을 잊고 좋았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오늘은 시를 썼다.
-
데이즈 곤
나는 아주 오래 누워 있었다 그러나 칼은 이제 쉬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계속
주어지는 흰 면발들을 끊어 내는 일
아주 오래 했다 나와는 아주
상관 없이
그가 쓰여지는 일이 있었다
찬장 위를 뒤져 보아도 칼과 나의 상관 같은 건 없었다
등과 이불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씻기고 말려지는 일
누워서 그런 일들이 해치워졌다
상관이 없어서일까 아주 오래 누워 있다 가끔 일어날 일이 있는 날에는
일어났다 가끔은
날들이 말 없이 서 있었다
지나가지도
다가오지도 않을 자세로
나를 향해 준비된 칼자루처럼
그러나 단수의 예고, 칼은 여전히 쉬고 싶었으며 이번엔 내가 일어나 있었다는 이야기라면
칼등을 눕혀 쥐었다
찬장에는 누가 비치는가
필자소개
김현수. 마산에서 시를 씁니다. 마산에서 시 모임 <시럽> 도 참여합니다.